국군은 주한미군이 철수함에 따라 1949년 1월부터 38도선 방어임무를 인수했다.
당시육군은 전체 8개 사단 23개 연대 규모였다.
수도경비사단
-전방배치: 1사단[11,12,13보병연대,8포병대대] 7사단[1,9,25보병연대,8포병대대] 6사단[2,7,19보병연대,16포병대대] 8사단[10,21보병연대,18포병대대] 옹진반도배치[17독립연대및지원포병대]
-후방배치: 대전2사단 광주5사단 대구3사단 (이들은 전략적예비가 아닌 후방에서 공비토벌등의 임무를 수행하고있었다.)
그리고 이 편제에 따른 23개 연대를 대대단위로 환산하게 되면 66개의 대대가 나온다.
그러나 실제로 38선 전방진지에 배치되어있는 병력은 겨우 12개대대에 불과했다.
나머지병력들은 전방사단의 예비로서 전방에서는 비교적 후방에 속하는지역에 배치되어있거나 후방사단의 병력(약30개대대)들은 애초에 공비토벌및 후방지역 경계를 위해 남겨져있었다. 가뜩이나 밀리는 병력인데 실제로 즉각 전투에 참여할수있는병력이 1/5정도였고 병력의 2/5정도는 전방사단의 예비대, 3/5내지~2/5에 해당하는 병력은 후방에 배치되어있었던 셈이다.

이표를 보면 북한군은 거의 대부분의 부대가 38선에 배치되어있는데 남한은 부대가 고르게 흩어져있다. 심지어는 제주 4.3사건의 영향으로 제주도에도 보병연대가 배치되어있다. 그에비해서 북한측은 두만강과 압록강변에만 약간의 부대가있고 내륙지방에는 부대가 거의없다. 심지어는 그 부대도 남진중이다.
38선과 현재군사분계선이 다른점은 38선은 그냥 위도선을 따라 그어놓은선이다.따라서 현재로써는 북한에 속하는 옹진반도도 남한땅이었다. 따라서 이땅에도 제17독립연대가 배치되어 경계하고있었다. 방어정면이45㎞에 달하는 이 지역은 38도선으로 말미암아 남쪽의 육지와 차단돼 후방과의 교통을 해로에만 의존해야 했다. 예하 3개 대대 중 2개 대대를 일선에 배치하고 나머지 1개 대대를 예비대로 옹진반도 중앙부인 옹진광산에 배 치했다. 통상 1개 사단의 방어정면 지역 10㎞에 비하여 약 4 .5배나 긴 거리를 1개연대가 방어하고있었던 셈이다.
서울의 북방 관문으로서 전략상 극히 중요한 개성-문산-고량포 지 역의 약 90㎞는 제1사단이 방어하고 있었다. 제1사단은 예하에 제11· 제12·제1 3연대와 제6포병대대및 공병대대를두고있었다. 제1사단은 국지도발에 대한 방어개념으로부터 정규전에 대비할 수 있도록 문산- 봉일천-서울 축선상에 전투력을 집중 운용한다는 방어계획을 수립해 놓았다.
중부지역의 요충지인 철원방면은 제7사단이 담당하고 있었으며, 예 하에 제1·제9연대와제8포병대대 및 공병대대를 두고 있었다. 당시 제 7사단은 적의 주공 방향으로 판단된 경기도 의정부일대를 경계하고 있었다. 방어정면의 거리는 적성에서 일동에 이르는 4 7㎞에 달했다.
춘천 정면은 제6사단이 담당하고 있었다. 사단 예하에 제2·제7·제1 9연 대와 제1 6포병대대 및 공병대대를 두고 있었다. 사단 방어정면은 사단 본부우측명지산에서관대면까지의 90㎞에이르렀다.
동해안의 강릉방면은 제8사단이 담당하고 있었으며, 예하에 제10· 제2 1연대와 제1 8포병대대 및 공병대를 두고 있었다. 사단 경계지역은 제6사단 우측 책임지역인 관대리에서 동해안에 이르는 2 6㎞지역 정면 이었다. 제8사단은 일단 침공한 적을 3 8도선 상의 진지에서 저지하지만, 진지가 돌파됐을 경우 방어중점을 동해안에 두고 인구-어성전-주 문진에서 적에게 타격을 가한 다음 연곡천변으로 적을 유도하여 이 선 에서적을격멸한다는것이었다.
6·25 전쟁 발발 당시 후방 예비사단은 수도경비사령부를 비롯해 제 2·제3·제5사단 등 총 4개 보병사단이 있었다. 각 예비사단의 임무는평시에는 군 예비대로있다가 전쟁이 발발하면 육군본부의 명령에 따라 북한의 주요 접근로로 판단되는 문산 및 의정부 축선의 방어임무를 맡 고 있는 전방사단에 대한 증원과 함께 명령에 의거해 공격을 위한 역습 을 실시하는것이었다. 먼저 수도경비사령부는 말 그대로 평시 서울에 주둔하면서 전쟁이 발 발하면 김포, 인천지구를포함한수도권 지구의방어를 준비하다가명령 에 따라적의주공진출로인제1사단과제7사단을지원하게돼 있었다. 그 밖에 제2·제3·제5사단은 전쟁 발발시 신속히 서울로 집결하여 서울 주변지역에 진지를 구축하고 적의 침투를 적극 방지하는데, 제2사 단은 춘천-의정부 지구를, 제3사단은 의정부-문산 지구를, 제5사단은 문산-의정부지구를 지원하고, 명령에따라공격을 위한역습을 실시하 도록 돼 있었다. 그리고 육군본부 직할부대로 서울 서빙고에 위치해 있 던 독립기갑연대는 전쟁 발발 시 경원선 철원 이남지역과 서울 동남 반 경 3 2㎞지역에대한수색임무를수행하고있던중이었다. 이처럼 후방예비사단의 평시 및 전시임무는 명확하게 규정돼 있었지 만 실제로는 그 작전계획을 한번도 실행해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국군 은 창군이래 3 8도선에서의 북한군 도발에 대처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후방지역의 공비토벌작전과 인민유격대 토벌을 위한 대비정규전 작전 에도 동원되느라사실상 조직적인 부대교육훈련을실시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정보는 과거의 정보이며, 정보자체도 다른점이 상당히 많으므로 100% 신뢰할수 없음을 밝힙니다.